스타 번역가의 삶은 우아하다?…당신이 모르는 K문학 뒷이야기

입력 2023-10-12 18:00   수정 2023-10-13 02:13

안톤 허(한국명 허정범) 번역가의 이름 앞엔 ‘최초’란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닌다. 지난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에 그가 영어로 옮긴 작품 <저주토끼>(정보라)와 <대도시의 사랑법>(박상영) 등 두 편이 후보로 올랐다. 한국 국적 번역가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해는 <저주토끼>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국도서상 번역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 역시 한국 작가 작품으로는 최초다. 한국 저자의 책으로는 처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BTS)의 책 <비욘드 더 스토리>도 그가 번역했다.

그가 낸 성과들은 ‘번역가’라는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늘 소설가의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번역가의 이름이 때론 원작자보다 앞설 때가 많아서다. “안톤 허가 번역했다고? 그럼 봐야지!” 그가 번역한 한국 책 출간 소식에는 이런 외국 독자들의 댓글이 줄을 잇는다. 그를 사칭해 작가들에게 연락하는 사기꾼까지 등장할 정도다. <저주토끼> 수록작 ‘몸하다’의 영어 제목을 ‘몸(body)’이란 단어를 살려 ‘The Embodiment(화신)’로 옮기는 등 탁월한 번역 실력으로 국내외 출판계에서 이름을 알렸기 때문이다.

안톤 허의 일상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우아한 번역가’와는 거리가 멀다.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탄성을 지른 것도 잠시. 영국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금을 부랴부랴 신청해야 했다. 그마저도 지급이 늦어져 몇 달 뒤 미국 출장 중에는 카드 한도 초과로 길바닥에서 밤을 지새울 뻔했다. 그는 여전히 한국 문학을 잘 모르는 외국 출판사들을 향해 ‘영업’을 하고, 관행상 번역가 이름을 표지에 넣는 미국 출판사를 상대로 기싸움도 벌인다.

안톤 허가 최근 출간한 에세이집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는 ‘한국 문학 번역가의 고군분투기’에 가깝다. 최근 서울 항동 ‘책방공책’에서 만난 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번역가란 무엇이냐”고 묻자 포장 하나 없는, 날것의 답이 돌아왔다.

“매일 천문학적인 숫자의 이메일을 쓰는 사람이죠. 번역만 해선 살 수 없어요. 번역가란 책을 둘러싼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저주토끼> 번역 과정만 해도 그랬다. 서울 홍대에서 열리는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책을 본 그는 작가와 출판사를 설득해 영미판 번역을 했다. 책을 찾고, 출판사 및 에이전시와 출판권을 협의하고, 샘플 번역본 일부와 번역 제안서를 들고 외국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출간 이후 소셜미디어에서 홍보 활동도 했다.

“작년에 영국 문화예술축제 헤이페스티벌에서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팔로어가 100만 명이 넘는 책 유튜버 잭 에드워즈가 지나갔어요. 놀라서 당장 달려갔죠. 그에게 <저주토끼> 영문판을 주면서 ‘이거 내가 번역한 책이다’고 했어요. 에드워즈가 ‘안 그래도 방금 이 책을 샀다’며 이후 영상에서 책을 소개했고, 그가 한국에 왔을 때 다시 만나 한국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런 노력은 간절하기에 가능했다. 드넓은 영미 도서 시장에서 번역서 비중은 3% 남짓. 업계에서는 통상 영어권을 통틀어 1년에 한국문학 작품이 10권만 출간돼도 많은 편이라고 여긴다. 이러니 한국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전업 번역가 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오죽하면 번역 수업 졸업부터 단행본 출판까지 평균 5~10년 걸리는 번역가 데뷔 준비 기간을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를까.

그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K팝이 잘나간다고 해서 한국 문학도 잘나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블랙핑크를 열광하는 팬들이 갑작스레 황석영 소설을 읽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까? 한국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 문학 번역가의 길을 택한 뒤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어려서부터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집안 반대로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 영문학 석사를 거쳐 통역사, 비문학 번역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을 전전한 끝에 36세에 늦깎이 전업 한국 문학 번역가가 됐다.

누구보다 한국 문학을 열렬히 사랑하는 독자라서 가능했던 여정이었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그는 KOTRA 해외 주재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홍콩, 에티오피아, 태국과 한국을 오가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한국 문학 작품들은 그 시절 위안이고 즐거움이었다. “번역을 하게 된 건 ‘이 작품 너무 좋은데, 같이 읽을래?’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죠.”

부커상 후보로 지명된 이후 에이전트를 고용해야 할 정도로 바쁜 몸이 됐다. 그래도 그는 1주일에 한 번 동네 책방을 다니며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탐험한다. 번역하고 싶은 시를 잘 읽어내기 위해 시 전문 서점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듣기도 했다.

에세이집 제목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는 서울대 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르며 겪은 일화에서 따왔다. 그는 시험지에 영어로 답변을 써내려가고 있는데, 시험감독을 하던 영문과 교수가 왜 영어로 쓰고 있느냐며 그러면 채점이 안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영어로 쓰면 안 된다는 지시가 없잖아요?” 하고 답했다. 그는 합격했고, 다음 학기부터 입학시험의 특정 문제 지시 사항에는 ‘답안지에 꼭 한국어로 써야 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그는 또 다른 ‘최초’도 앞두고 있다. 태어나 처음 자신의 소설을 출간하기로 계약한 것. 미국 대형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의 임프린트 하퍼비아에서 안톤 허의 영문 장편소설이 내년 7월 출간될 예정이다. 화가들에 대해 쓴 한국어 소설도 한국 출판사에서 내기로 했다. 독자들은 곧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소설을 쓰는 최초의 한국 작가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그럼 안톤 허의 소설은 그가 직접 번역하게 될까. “놉(Nope).” 그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제 글은 제가 번역 안 해요. 누군가가 내 글을 번역해준다는 건 엄청난 영광이죠. 함께 읽을 글로 선택됐다는 것이니까요. 저도 누군가 제 소설을 선택해주길 기다릴 거예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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